이대진, 문희수, 송유석. 3명 가운데 누굴 선발로 내보내면 좋겠어?” 1993년 10월 21일 대구 수성관광호텔을 떠나 대구구장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해태 김응용 감독이 유남호, 이상윤 두 투수코치에게 던진 질문은 그랬다. 두 투수코치는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3차전을 앞두고 김 감독은 선발투수 선정에 애를 먹었다. 고졸 신인으로 10승 투수가 된 이대진, 정규시즌에서는 5승에 불과했지만 1987, 1988, 1989년 3년 연속 한국시리즈 3차전 승리투수라는 진기록을 세운 문희수, 정규시즌 11승 6패 평균자책 2.90을 기록하며 마운드의 핵으로 부상한 송유석. 이 가운데 한명을 선발투수로 정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경기 전 잠시 비가 내린 대구구장의 그라운드 상태를 확인한 김 감독은 결국 문희수를 선발투수로 낙점했다. 투구동작에서 발을 크게 내딛는 송유석이 자칫 비에 젖은 마운드 위에서 미끄러질 염려가 있고, 그걸 신경쓰다보면 제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는 경험이 부족한 이대진도 마찬가지였다.


 
1993년 삼성 신인 박충식은 그해 신인투수 가운데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고 귀여운 얼굴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문희수 카드’에 삼성 벤치는 반색했다. 그 해 하향세를 타던 문희수 정도라면 유례없는 ‘투고타저((投高打低)’속에서도 8개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세 자릿수 팀 홈런(133개)과 가장 높은 팀 타율(2할7푼1리)를 기록한 삼성 타선이 능히 제압하리란 판단이 섰다.

게다가 선발투수 확정에 장고를 거듭한 해태에 비해 삼성은 이미 3차전 선발로 그해 14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 2.54를 거둔 ‘슈퍼루키’ 박충식을 선발로 발표한 터였다. 정규시즌 해태전 3승2패 평균자책 1.79를 기록하며 ‘해태킬러’로도 불리던 박충식의 투입은 삼성 우용득 감독에겐 필승카드나 다름없었다.

“충식아, 우짜든 6회나 7회까지만 막아도. 뒤는 걱정하지 말고.” 1993년 10월 21일 대구구장에서 삼성 권영호 투수코치는 마운드에 오르려는 박충식의 등을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7회까지면 시간 금방 가삔다. 후회 없이 던지다 온나.” 또 다른 투수코치 양일환도 박충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두 투수코치가 ‘7회까지’를 강조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7회까지 해태 타선을 꽁꽁 묶는다면, 이닝이 거듭되면 될수록 투수자원이 풍부한 삼성이 유리하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해태는 2차전까지 7명의 투수를 총동원한 상태라, 4·5·6·7차전을 대비한다면 3차전에 많은 투수를 올릴 형편이 못됐다. 특히나 해태는 선동열이 1차전에서 이미 2이닝을 던진 뒤였기에, 팀이 뒤지고 상황이라면 3차전에 굳이 그를 투입시킬 이유가 없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삼성은 시리즈 전적 1승1패의 팽팽한 힘의 균형을 단숨에 2승1패의 우위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윽고 박충식이 마운드에 오르기 위해 더그아웃의 계단을 힘차게 올랐다. 그리고 자신을 응원하는 선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저, 7회까지 열심히 던지다 들어오겠습니다.”

7회만 막아라. 그러나

 
1993년 삼성엔 4명의 선발투수가 12승 이상씩을 거뒀다.
이 가운데 14승을 거둔 신인 박충식이야말로 실질적인
팀의 에이스였다. 사진은 류중일(오른쪽)과 함께 ‘이달의 선수’로
뽑힌 박충식이 기념촬영에 응하는 장면이다

1993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 삼성 선발투수로 출전했다. 2차전까지 두 팀이 1승1패로 팽팽히 맞서 3차전이 어느 경기보다 중요했다. 당시 삼성 우용득 감독이나 투수코치들이 특별히 요구한 게 있었을지 싶다.

어떻게든 6, 7회까지 막아달라고 했다. 그러면 삼성에 승산이 있다고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중간계투, 마무리가 잘 짜여진 상태가 아니라, 여차하면 완투도 각오해야 했다. 코칭스태프는 7회까지 막길 바랐지만 난 처음부터 달랐다.

처음부터 달랐다면.

9회까지 완투할 각오가 돼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이상을 던졌다.

(숨을 크게 내쉬며) 누가 아닌가. 9회 이후까지 던지리라고는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훗날 몇몇 분들이 “박충식이 야구를 오래 못한 건 그날의 혹사 때문이었다”고 하시던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 경기가 없었으면 날 기억하는 이들도 지금 같지 않았을 거다. 어차피 인생이란 뭔가를 얻기 위해선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지 않나.

'경희대 빠삐용' 박충식의 방황

잠시 과거 이야기 좀 하자. 많은 이들이 ‘박충식’하면 삼성을 떠올린다. 당신을 대구출신으로 아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원래는 고향이 전라남도 광주다. 줄곧 거기서 자랐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광주출신치고 대구에서 나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이도 드물지 싶다. 지금도 대구·경북 야구팬들께 늘 감사한 마음이다.

광주 중앙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한 것으로 안다.

중앙초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야구공을 잡았다. 그땐 비쩍 마르고 키도 작아서 별로 볼품이 없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게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공을 사이드암으로 던졌다. 결국 은퇴할 때까지 줄곧 옆구리에서만 공을 던졌으니….

무등중학교 때까지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광주상고(현 광주 동성고) 진학 뒤 몰라보게 달라졌는데.

고교 때 진짜 운동을 많이 했다. 입안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고 숨이 목에 찰 때까지 러닝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선지 조금씩 힘이 붙고 몸집도 좋아졌다. 확실히 몸이 좋아지니까 공끝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1988년 제 22회 대통령배대회를 통해 ‘박충식’이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대구상고와의 결승전에 앞서 4경기를 모두 완투했다. 결승도 선발 고천주가 던지다 내가 이어 받아 마무리를 지었다. 그때 내 별명이 오죽 많이 던졌으면 ‘고무팔’이었겠나(웃음).

대통령배 우승으로 당신의 지명도가 급상승했다. 해태에서 가만 둘리 없었을 텐데, 어째서 프로 대신 대학행을 선택했나.

해태에서 날 지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계약금과 연봉이 높지 않았다. 워낙 해태가 잘 나가던 시절이라, 내가 크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다 당시만 해도 프로 신인들은 거의가 대졸선수들이었다. 대학 졸업 뒤 프로무대를 밟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1980년대 후반이면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등 야구명문대학들이 불꽃 튀는 스카우트전을 펼쳤을 때다. 경희대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나. 그즈음 경희대는 교내 야구장이 없어 고등학교 야구장을 전전했는데.

왜 그거 있지 않나.

‘끼워팔기’ 말인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만 진학한다면 연·고대 입학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학교 입장에선 한명이라도 더 대학 진학을 시켜야했다. 나 역시 의무감이 있었고. 2명을 데려가는 조건으로 경희대에 입학했다. 졸업 때 교사자격증이 나온다는 말에 귀가 솔깃한 것도 있고(웃음).

하지만 경희대 진학 뒤 4년간 ‘고무팔’ 박충식을 봤다는 이가 거의 없었다.

고교 때 잘 나가던 선수들이 어째서 대학만 가면 ‘불운의 투수’로 전락하는지 아는가.

대학 체육부의 굴절된 선·후배 문화 탓이 크다는 생각이다.

맞는 소리다. 여자, 술, 담배는 죄다 대학에서 배운다. 난 당시 이해를 못했다. 광주 촌놈이 서울로 상경할 땐 야구로 멋지게 성공하자는 다짐이 있었을 텐데, 매일 선배들 쫓아다니면서 못 마시는 술을 왜 억지로 마셔야하고, 선배들 뒤치다꺼리를 어째서 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즈음 대학 체육부의 잘못된 선·후배 문화로 많은 대학선수들이 야구부 기숙사를 탈출했다. 당시 그런 선수를 가리켜 ‘빠삐용’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당신은 어땠나.

이상훈이 ‘고대 빠삐용’이면 난 ‘경희대 빠삐용’이었다. (이)상훈이가 고대 선배들한테 두들겨 맞으면 경희대로 피신했고 내가 맞으면 고대로 넘어갔다(웃음). 그마저도 힘들면 고향으로 도망가곤 했다.

대학 중퇴도 심각하게 고려했을 듯하다.

한 번은 광주 집으로 도망친 다음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더는 운동 못하겄소. 프로에 가야것소.” 그래, 해태를 찾아갔는데.

오라던가.

(손을 내저으며) “대학 졸업하고 오라”고 했다.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야구규약에 ‘대학 중퇴자는 바로 프로에서 뛸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 어떻게 했나.

별 수 있나. 학교로 돌아갔지. 하지만 매일 아프다고 핑계대면서 야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나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왜냐? 등판만 하면 매일 두들겨 맞았으니까. 오죽했으면 학교 윗분이 “넌 학교를 위해 아무 것도 한 게 없으니 차라리 1년 유급을 하라”고 했겠나(웃음).

해태에서 삼성으로 틀어진 야구인생

 
현역시절 박충식의 별명은 ‘찰리 브라운’이었다. 미국
만화영화 ‘스누피’에 나오는 주인공과 닮았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그런 까닭일까. 그는 유독 어린이 팬들이 많았다

대학에서 태업성 플레이를 펼쳤지만 해태는 여전히 당신을 높이 평가했다. 당신을 영입하기 위해 해태에서 모종의 계획을 짜기도 했다던데.
대학 4학년 때 각종대회에 출전해 5승인가를 했다.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해태는 광주상고 시절의 나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종범을 1차 지명자로 뽑은 뒤 나한테 해태 관계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무슨?
“삼성이 널 노리고 있으니 입단의사를 타진하면 무조건 ‘난 안갑니다’ ‘군대 갈 예정입니다’하고 말하라”고 했다.

삼성이 박충식을 노린다라.

당시 삼성 이문한 스카우트가 경희대에 자주 찾아와 내 투구를 주의 깊게 보다 가곤했다. 물론 그때만 해도 ‘설마’했다. 하지만.

하지만 1993년 삼성에 2차 1번으로 지명돼 계약금 5천만 원을 받고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5천만 원이면 꽤 큰 돈이었다.

해태에 꼭 입단하고 싶었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삼성도 해태처럼 프로구단이고, 어느 구단에 입단해도 나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 게 사실이었다. 계약금은 나도 깜짝 놀랐다. 나같이 대학에서 ‘펑펑’ 논 선수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줘도 되나 싶었다. 만약 내가 해태에 입단했다면 계약금이 3배는 줄었을 거다(웃음).

프로 입단 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상이었다. 전지훈련 때는 아주 홀대를 받았다. 체격은 삐쩍 마른데다, 체력은 바닥이었다. 그렇다고 공을 시원스럽게 던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감독과 프런트 고위층 사이에서 “저게 무슨 투수냐”는 볼멘소리가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993년 4월 15일 잠실 OB전이 데뷔 첫 경기였다. 감독과 프런트의 불만을 ‘쏙’ 들어가게 할 만큼 훌륭한 투구를 선보였다.

내가 봐도 기가 막히게 던졌다. 지금도 기억한다. 그때 삼성 선발이 김상엽이었지 싶다. 이 친구가 잘 던지다 갑자기 팔이 아프다면서 6회인가에 자진 강판했다. 그때 감독이 내 이름을 부르는데.

무척 떨렸겠다.

(감탄사를 몇 번이나 터트린 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긴장해 본적도 없는 것 같다. 게다가 타자가 대학 때 내 킬러로 통했던 추성건이었다. 그 친구한테 대학에서 맞은 홈런이 서너 개나 될 정도로 무척 까다로운 타자였다.

추성건을 멋지게 삼진으로 잡았나.

아니다. 안타를 맞았다.

부담이 커졌을 법 한데.

정반대였다. 이상하게 추성건한테 안타를 맞고 나니까 긴장이 ‘확’ 풀리면서 되레 그때부터 힘이 나기 시작했다. 나머지 11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단, 1안타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내 보직은 주로 패전처리였다.
 
박충식은 시속 140km 중반대의 빠른 직구와 명품 싱커로
프로의 쟁쟁한 타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패전처리 투수가 5월 5일 어린이날 광주 해태전 선발투수로 출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린이날 경기는 투수들에겐 올스타전, 포스트시즌 못지않은 빅매치 가운데 하나다.

원래는 나처럼 잠수함 투수였던 이태일 선배가 선발로 내정돼 있었다. 그런데 이 선배가 팔꿈치가 아파 도저히 던질 수가 없었다. 내가 대타로 선발출전을 했는데.

대박이었다.

9회까지 1실점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그때 직구구속이 꾸준히 시속 140km 중반대를 형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이후 7연승을 달리며 시즌이 끝날 때까지 14승을 거뒀다. 같은 해 프로에 입단한 LG 이상훈, 한화 구대성이 10승을 올리지 못했으니 개인적으로 대단한 성적이었다고 자부한다.

일반적인 해 같았으면 신인왕은 당연히 당신의 몫이었다. 그러나 1993년은 슈퍼루키들의 시즌이었다.

이종범, 양준혁 등 쟁쟁한 신인타자들이 많지 않았나. 그때 만약 내가 데뷔하자마자 선발로 뛰며 승을 챙겼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더 재미난 신인왕 경쟁이 되지 않았을까.

대학 때 철저하게 무명이었던 투수가 프로 데뷔 첫해 14승을 거뒀다면 일종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기적의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유야 많겠지만 그때는 대구란 낯선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산볼파크 기숙사로 자진 입소했고 외출은 꿈도 꾸지 않은 채 오직 야구에만 전념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한다. 운동선수에게 천부적 소질은 사실 큰 몫이 아니라고. 자기 자신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기자를 향해) 양준혁 선배가 지금까지 잘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

밖에 나가 아무리 놀다 들어와도 스윙연습을 잊지 않는 집요함과 성실함 때문이다. 양 선배는 정말 야구밖에 모르는 이다. 야구열정이 엄청난 선수고. 그이가 자기 소질만 믿고 운동했다면 아마도 진작 은퇴했을 거다. 나 역시 같다. 그때 야구에만 매달렸기에 대학 때의 방황을 딛고 데뷔 첫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연장 15회 181구를 던진 사내

1993년 정규시즌도 대단했지만 그해 가을 당신의 활약은 입이 쫙 벌어질 만큼 대단했다. 한국시리즈에 앞서 열린 LG와의 플레이오프전에서부터 맹활약을 펼쳤다.

플레이오프전에서 2경기 연속 출전했나. 삼성이 내리 2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하는가 싶었는데 3차전에서 내가 선발로 나가 0-2 완투패하며 결국 시리즈 전적 2승2패를 기록하게 됐다. 마지막 5차전에서 선발 김태한 선배가 잘 던지다 4회 갑자기 난타를 당하는 통에 내가 바로 구원투수로 올랐던 게 기억난다.

9회 완투한 투수가 하루 쉬고 4회부터 출전을 강행한 건 모험이었다.

코칭스태프로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김태한 선배는 갑자기 흔들리지, (김)상엽이는 아프다 하지…. 투수코치가 갑자기 나보고 “등판준비 하라”고 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왜냐? 3차전 완투하고 온 몸에 알이 박혀 몸을 까딱하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원체 긴장을 해서 그런가. 그 뻑뻑했던 몸이 막상 경기가 시작하자 확 풀리지 않나. 결국 4회 등판해 9회까지 1점도 내주지 않고 경기를 끝냈다.
 
1993년 플레이오프 5차전 LG를 꺾은 삼성 투수 박충식과
포수 김성현이 포옹하고 있다

그 경기 승리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 올라 정규시즌 1위팀 해태와 맞붙게 됐다.

삼성이 해태에 이어 정규시즌 2위였지만 시즌 상대전적은 우위(주:11승 7패)였다. 두 팀이 맞붙으면 실력에선 확실히 삼성이 앞섰다. 많은 야구전문가들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삼성의 우승을 점쳤고.

당신이 유독 해태에 강한 것도 삼성으로선 희망적 메시지였다.

당시 해태 타자들은 매우 공격적이었다. 공을 기다리기보다 이거다 싶으면 바로 배트를 휘둘렀다. 내 유인구에 매번 속게 마련이었다.

규정타석을 지킨 해태 타자 가운데 타율 2할8푼의 이종범이 팀 내 가장 높은 타율이었는데 반해 당시 삼성은 무려 세 타자가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했다. 여기다 삼성은 정규시즌 해태전에서 타율 2할9푼을 기록하며 해태 마운드를 초토화시키곤 했다. 하지만 이보다 삼성에게 긍정적인 신호는 투수진에서도 해태에 뒤질 게 없다는 자신감이었다.

맞다. 그해 해태는 선동열, 이강철, 조계현, 김정수, 이대진, 송유석 등 무려 6명이나 되는 10승 투수를 배출한 투수왕국이었다. 하지만 삼성 역시 선발투수 4명이 12승 이상씩을 기록하는 등 그해 최고의 성적을 냈다. 완투는 삼성 선발투수들이 오히려 훨씬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주:해태 투수진 완투 12회, 삼성 24회) 누가 봐도 투수진에서도 삼성이 전혀 밀릴 게 없었다.

시리즈 전적 1승1패로 팽팽히 맞서던 삼성과 해태에게 3차전은 팀의 운명을 결정짓는 한판이었다.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한국시리즈 전체 판도가 달라질 게 자명했다. 이에 삼성은 당신을 필승 카드로 내밀며 승리를 확신했다.

(목소리에 힘을 주며) 컨디션이 최고였다. 직구, 슬라이더, 싱커 등 던지는 족족 스트라이크 존 ‘꽉’ 찬 코스로만 들어갔다. 실투라고 해봤자 1개 정도였는데 그게 공교롭게….

홈런으로 연결됐다.

그렇다. 1-1 동점이던 6회 홍현우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다. 광주상고 후배인 (홍)현우는 원체 나를 잘 아는데다 내 공에 자신감이 넘쳤다.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안 잊어버리네. 바깥쪽 직구를 던질까, 몸쪽 싱커를 던질까 고민하다 현우가 약간 다리를 뒤로 빼는 것 같아 싱커를 포기하고 직구를 던졌는데 그 공이 가운데로 쏠렸다. (혼잣말로) 그 공만 안 넘어갔으면 삼성이 이겼지 싶은데….

홍현우의 홈런으로 1-2, 전세가 뒤집어졌지만 삼성도 곧바로 해태 에이스 선동열을 상대로 동점을 뽑았다. 3회부터 문희수에 이어 마운드를 지킨 선동열은 7⅓이닝동안 101개의 공을 던지다 송유석으로 교체됐다. 이때 많은 이들이 삼성의 승리를 점쳤는데.

해태는 천운이 따랐다. 그렇지 않은가. 선동열 선배가 물러난 뒤 송유석으로 바뀌었을 때 삼성 벤치에서 “이제 이겼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송유석 공이 좋기도 했지만 삼성 타자들이 1루에 주자만 있으면 땅볼을 치는 바람에 매번 기회를 무산시켰다. 그게 해태의 천운이 아니고 뭐겠는가(웃음).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 등 해태 투수 3명을 상대로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특히나 선동열과의 맞대결은 좀체 보기 힘든 명승부였다.

내 공에 확신이 있었기에 선동열 선배가 아니라 선동열 할아버지가 와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맞대결 소감을 물었을 때 비로소 ‘내가 대투수와 접전을 벌였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연장 15회 완투는 감독의 지시였나 혹은 묵인이었나. 그도 아니면 감독의 지시를 당신이 어긴 것이었나.

이닝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투구내용이 더 좋아졌기에 코칭스태프에서도 바꿀 기회를 놓쳤다. 무엇보다 내가 마운드에서 내려갈 의사가 없었다. 권영호 투수코치가 걱정되니까 “괜찮냐? 어디 아픈데 없냐?”하고 물으면 “코치님, 그런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마십시오. 전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던질 겁니다”하고 짜증을 낼 정도였다. (야구공을 손에 쥐며) 연장 15회 제한이 없었으면 난 20회, 30회도 던졌을 거다.

당신이 연장 15회까지 버틸 수 있던 배경은 뭐니뭐니 해도 싱커에 있다고 본다.

정확한 지적이다. 볼카운트 투스트라이크원볼이나 투스트라이크투볼에서 항상 몸쪽 싱커를 던졌다. 그땐 워낙 공끝이 좋다보니까 헛스윙이거나 쳐도 땅볼이게 마련이었다. 해태 타자들이 싱커만 던지면 깜짝 놀라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얼마나 ‘획’하고 몸쪽으로 꺾였으면 이순철 선배 같은 이는 심판한테 “이게 무슨 스트라이크냐, 당신이 한번 쳐 보라”면서 어필할 정도였다.

당신의 싱커는 한국프로야구사에서 최고로 꼽힌다. SK 조웅천, 정대현도 싱커를 던지지 않고 서클체인지업을 던지는데. 두 투수 말로는 “싱커만큼 구사하기 힘든 공도 없다”고 하던데.

싱커는 프로 들어와 양일환 투수코치에게 배웠다. 엄청난 연습이 필요한 구종이다. 그러나 일단 익히면 땅볼처리로 투구수를 절대적으로 줄일 수 있는 공이다. 현역 시절 정말 고비이거나 쉬고 싶을 때 주로 싱커를 던졌다. 물론 이 때문에 수술대에 더 빨리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한국프로야구사에서 최고로 꼽히는 박충식의 싱커 그립
4시간 30분의 사투는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181구를 던진 당신의 고군분투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됐는데.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멍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181구에 대해 말했지만 내겐 그 시간이 181년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잠자리에서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온몸이 어찌나 쑤시고 뻐근한지. 그제야 ‘아, 내가 어제 무슨 일을 한 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한국시리즈 7차전에도 등판했다.

다시 선발투수로 나왔다. 그땐 오래 던지지 못했다. 4⅔이닝인가 던져 2실점하고 물러났다.

연장 15회 완투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나.

(고개를 흔들며) 3차전만큼 공이 좋았다. 다만 한껏 기가 오른 해태 타자들이 잘 치고 운도 따랐다. 아니 꼭 공을 쳐도 수비수 없는 데로만 공을 떨어뜨리는지(웃음). 뭐니 해도 이종범의 역할이 컸다. 당시 (이)종범이의 1루 출루는 3루 진루를 의미했다. 아무리 투수가 견제를 하고 포수가 송구를 잘 해도 도저히 이종범의 발을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라. 무사나 1사 3루에 주자가 있으면 득점은 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실제로 종범이가 3루에 있으면 꼭 홍현우가 안타를 치든 희생타를 치든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선취점을 그렇듯 쉽게 내니 어디 당할 재간이 있나.
 
1993년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와 7차전까지 접전
끝에 시리즈 전적 2승1무4패로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9년 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7차전에서 지고 준우승이 확정된 뒤 아쉬움이 컸을지 싶다. 가뜩이나 삼성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6번의 한국시리즈에서 내리 준우승에 머무는 한계를 드러냈다.

7차전이 끝나고 무슨 시상식을 하는데 나가지 않았다.

그럼 어디 있었나.

구장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엉엉’ 울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 밖에 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2002년까지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당신 탓이 아니었단 뜻이다.

삼성에 입단하며 그런 의문을 가졌다. ‘아니 이렇게 뛰어나고 좋은 선수들이 많은데 왜 삼성은 만년 2등일까’하는. 입단 첫해 한국시리즈를 뛰어보니까 아유를 알겠더라. (단호한 음성으로) 삼성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깡다구가 없었다. 볼인데 스트라이크로 판정돼 삼진을 당해도 조용히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지, 해태처럼 뻔히 스트라이크인데도 볼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칠게 항의하는 법이 없었다.

팀 분위기도 해태에 비해 좋지 않았나.

팀 분위기는 좋았다. 그런데 그것만 좋았다(웃음). 우승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치긴 했는데 우승하는 방법을 몰랐다.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은 주자 2루에 두고 매번 내야땅볼을 쳤다. 반면 해태는 한 번 올까말까한 찬스를 놓치지 않고 홈런으로 연결하며 분위기를 역전시키기 일쑤였다. 당시 삼성 프런트에서 한국시리즈 우승만 하면 집 한 채씩 사준다고 말했지만 정작 팀에 필요한 건 그런 메리트가 아니라 우승하는 방법이었다.

그해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비록 팀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당신은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한국시리즈 끝나고 강기웅 선배가 결혼을 했다. 그때 식장에 하객으로 참가했는데 날 보기 위해 찾아든 팬들 때문에 도저히 식장에 있을 수가 없었다. 종이학은 너무 많이 선물 받아 지칠 정도였고 편지도 말도 못하게 왔다. 우편배달부가 거의 매일같이 부대에 담아왔으니 말 다한 거지(웃음).

어깨수술 뒤 11개월 만에 마운드에 오른 박충식

1994시즌에도 14승을 거뒀다. 1995, 1996년은 방위병 복무를 하며 출전하는 바람에 각각 9, 8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6시즌은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를 오가며 던진 통에 12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다.

1996년엔 오늘은 선발로 나갔다 내일은 마무리로 뛰는 게 일상이었다. 어쩔 때는 4회부터 등판했다. 김상엽, 김태한, 성준 선배가 부상으로 차례로 무너지면서 내가 그 공백을 메워야만 했다. 당시 백인천 감독님이 내 스타일을 좋아해 여러 보직에 두루 기용한 까닭도 있었다.

백 감독이 어느 면에서 당신을 칭찬하던가.

야구를 쉽게 한다고 했다. 타자를 빨리빨리 상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주 칭찬했다.

그러나 야구는 PC게임이 아니다. 선발, 중간, 마무리를 모두 잘 할 수 있는 투수는 없다. 설령 있다손 쳐도 부상의 악령이 가만 둘리 없다.

그땐 다 그렇게 하던 시절이 아니었나. 백 감독한테는 지금도 불만이 없다. 하지만 역시 오래 못가 어깨에 이상이 왔다. 1997년부터 공을 던질 때 오른쪽 어깨가 아팠다. 그해 시즌이 끝나 미국 프랑크 조브 박사에게 찾아갔더니 어께가 말이 아니라고 했다.

결국 1998년 11월 어깨관절순 수술을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너덜너덜해진 어깨근육을 다 떼어냈다. 재활기간이 적어도 1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어깨는 팔꿈치보다 재활기간이 더 오래 걸리는 부위다. 대개는 1년 이상 충분한 재활시간을 요구한다. 하지만 당신은 예외였다. 수술한지 11개월 만에 마운드에 올랐다. 미 메이저리그 트레이너협회(PBATS) 자료를 보면 어깨관절순 수술을 한지 1년 안에 실전투구를 하는 건 만취된 상태로 스포츠카를 모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만큼 어리석다는 뜻이다. 어째서 당신이 그 같은 행동을 했는지 궁금하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삼성 구단 고위 관계자의 당부가 있었다.

어떤 당부였나.

팀이 플레이오프에 오를 것 같으니 그때까지 몸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런 세상에.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나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즌 막판 3경기에 출전해 연습투구를 했을 때도 이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그게 뭔가.

어깨에만 신경 썼다는 거다. 투구를 하기 위해선 몸 전체가 완벽해야 하는데, 난 어깨만 나으면 되는 줄 알았다.

당신은 어깨수술을 받은 지 11개월 만에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포함되는, 세계야구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적과 어리석음을 동시에 연출했다.

(맥없이 고개를 숙이며) 난 그저 팀에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당시 트레이너가 감독님한테 그랬다고 한다. “(박)충식이는 절대 연속투구를 해선 안 된다”고. “그럼 큰일 난다”고.

어깨수술한지 11개월 된 선수를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포함시킨 감독이 연속투구 경고 따위를 새겨듣겠는가.

플레이오프 첫 경기였다. 노장진, 임창용이 이어 던지며 연장 12회까지 롯데 타선을 4실점으로 잘 막았다. 그런데 연장 12회가 되니까 던질 투수가 없었다. 첫 경기에 모든 투수를 동원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때 코칭스태프가 나보고 “등판하라”고 했다. 그래 1이닝동안 3타자를 상대로 삼진 2개를 빼앗으며 나름 호투를 펼쳤다.

그때 삼성이 12회말 득점을 내며 당신이 구원승을 따내지 않았나.

스스로도 감격스런 승리였다. 삼성을 위해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다음날 경기에 등판할 때도 팀을 위해 내가 뭔가 기여한다는 게 마냥 기뻤다.

연속투구에 대한 경고는 잊고 있었나. 아무리 팀 승리가 중요해도 스스로 몸을 보호하는 게 중요하다.

선발 김상진이 6회까지 잘 던져 삼성이 롯데를 4-1로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나더러 7회에 등판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7회 등판해 1실점하고 8회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그런데 8회 첫 타자였던 박정태가 문제였다. 어찌나 계속 파울을 쳐내는지 투구수가 부쩍 늘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팔꿈치에서 ‘퍽’하는 소리가 나면서 찌릿찌릿 전기가 왔다.

팔꿈치 인대가 끊어질 때 나는 소리다. 휴우 -.

순간 더그아웃을 보며 ‘X’자 표시를 했다. 팔꿈치에 이상이 온 게 확실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하니까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다고 했다.

한국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인재(人災)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야구욕심이 너무 많았다. 몸 전체를 재활했어야 하는데 어깨에만 집중했고 재활기간도 짧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때 공이 정말 좋았다. 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더 놀라운 건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는데도 엔트리에서 빠지지 않고 플레이오프 7차전까지 팀원들과 동행했다는 사실이다.

(한참 침묵하다가) 팀에…팀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코칭스태프도 나를 엔트리에서 빼지 않았다.

해태 이강철과 함께 최고 언더핸드 투수로 군림하던
박충식은 무리한 투구로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이후 리그를 지배했던 그의 강력한 투구는 조금씩
빛을 잃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지고 2번째 수술대에 올랐다.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으러 다시 조브 박사를 찾았다. 그즈음 플레이오프 패배 책임을 지고 서정환 감독이 물러나고 김용희 감독이 삼성 새 사령탑에 올랐다. 하루는 수술 뒤 한창 재활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삼성 관계자였다. 한참 안부를 묻고 말을 빙빙 돌리다 (얼굴이 어두워지며)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이었나.

“삼성에서 FA(자유계약선수) 이강철을 영입하는 대신 널 보상선수로 KIA에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잔인하지만 그때 기분을 묻고 싶다.

내가 수술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럴 수 있는지 의아했다. 7년 동안 팀이나 감독이 원하고 해달라는 걸 모두 들어준 내게 이럴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내가 이강철 선배의 보상선수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 가운데 가장 기막히고 잔인한 건 내게 전화를 건 이가 다름 아닌 나를 스카우트했던 이문한 스카우트였다는 거다. 나를 뽑은 이에게 나를 내치는 전화를 하도록 했다니…. ‘이게 야구판의 생리구나’하는 생각이 들리면서 뭔가 모를 비애가 느껴졌다. 그때 인생이 무엇인지 배웠다. 너무 충격이 커 귀국 날짜를 연기하고 아무도 모르게 입국했는데, (혀를 차며) 참….

?

입국장에 삼성 사장과 단장이 어떻게 알았는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제 자기팀 선수도 아닌데 어째서 마중을 나온 걸까.

나도 처음엔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공항 커피숍에서 나와 아내 보고 그랬다. “박 선수가 팀을 위해 고생을 많이 한 만큼 구단은 언제든 박 선수가 복귀하면 코치로 쓸 것이다. 지금 각서를 써서 이를 증명하겠다.”

음, 일종의 회유이지 싶은데.

혹시라도 내가 보상 선수건으로 반발해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날 달래고 무마시키려고 찾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딜 가든 열심히 운동만 하면 되지 팀이 무슨 상관입니까”하며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짐을 다 싸고 대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는데 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누구였나.

이문한 스카우트였다. 이 스카우트가 날 보더니 눈물을 쏟아냈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하는데…. (눈시울을 붉히며) 허허, 그 양반이 무슨 죄가 있었겠나. 다 내가 야구를 못해서 그런 거지. 내가 야구를 못하고 어리석어서 그런 거지….

고향팀 해태로 돌아왔으나 기쁨도 잠시

2000년 결국 고향팀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감회가 남달랐을 듯싶다.

해태에서 반드시 재기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해태의 재활시스템은 삼성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느 정도였나.

삼성은 선수가 찾기 전에 트레이너가 재활정보를 세세하게 알려줬다. 그러나 해태는 선수 스스로 정보를 구하고 재활도 해야 했다. 게다가 재활이 전적으로 자비로 이뤄졌다. 미국으로 재활을 떠나도 선수가 자기 돈 내서 해야 했다. 더 어처구니가 없던 건.

어처구니가 없던 건?

구장 내 웨이트 트레이닝장이었다. 가뜩이나 구장 후미진 곳에 아무렇게나 지은 웨이트장이었는데 역기에 돌맹이가 걸려 있었다. 믿어지는가? 무슨 프로야구 웨이트장이 동네 약수터도 아니고 제대로 된 트레이닝 기구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해태 트레이너에게 “아니 한국시리즈 우승을 9번이나 했다는 팀의 웨이트장이 이게 뭐냐”고 따졌겠는가(웃음). 지금도 해태 우승은 미스테리다. 그때 이대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재활을 포기했을 거다.

해태의 낙후된 웨이트트레이닝 시스템만 당신의 재활을 방해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 그해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선수협)파동도 한몫했다.

선수협 파동의 주동인물 가운데 한명으로 꼽혔다.

해태 온지 얼마 안됐을 때 마침 양준혁 선배가 해태에 있었다. 하루는 양 선배가 책을 한권 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일본선수협과 관련된 책이었다. 양 선배가 “우리도 선수들을 위해 이런 협회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건 몰라도 양 선배 말 가운데 90%이상이 후배들의 권리와 권익에 관한 것이라 신뢰가 갔다.

양준혁의 말에 뭐라고 했나.

“형 생각이 그러면 나도 끝까지 지지하겠소”라고 했다. 이유가 있었다. 양 선배 말이 옳기도 했지만 양 선배가 대구출신이기에 해태에는 기반이 전무했다. 거기다 워낙 해태 선수들 개성이 강하다보니 내가 가운데서 중재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삼성에서 ‘팽(烹)’ 당하며 나 역시 선수들의 권리와 권익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터라 흔쾌히 동조한 측면도 강했다.

2000년 해태 유니폼을 입은 박충식은 선수협 발족에 주도
적으로 참여하느라 재활에 소홀했다. 하지만 후배들을
위해 한 일이기에 지금도 후회는 없다

당시 해태의 최선참 선수가 선수협에 반대하는 바람에 당신과 대립각을 이룬 것으로 알고 있다.

(굳은 표정으로) 당시 해태는 선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경직된 선·후배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율적인 의사표현이란 게 존재할 수 없었다. 당시 그 최선참 선수의 말이 곧 선수들 사이에서 법으로 통했다. 구단도 직접적으로 선수들을 관리하는 대신 최선참 선수를 활용했다.

양준혁과 최선참 선수 사이에서 입장이 곤란했을 것 같다.

최선참 선수에게 직언할 이가 나밖에 없었다. 그와 전지훈련장에서 선수협 문제를 놓고 티격태격 싸우기를 반복했다.

단순히 선수협 때문에 해태 최선참 선수와 갈등을 빚은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해태식 선·후배 문화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들었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난 룰을 바꾸고 싶었다. 프로에서 강압적인 위계질서는 결국 퇴보를 의미할 뿐이었다. 예를 하나 들겠다. 전지훈련 가서 선수들이 맥주 한두 잔 마시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생각해보라. 성인에 거의가 가정이 있는 가장들 아닌가. 그런데 당시 해태 코칭스태프에선 무조건 밤 11시에 예외 없이 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자란다고 모두 자겠나. 젊은 선수들이 삼삼오오 맥주 한잔 마시러 나간다 치자. 그러다 맥주 마시려고 외출하는 선참 선수들과 마주쳤다 치자. 어차피 서로 맥주 마시러 나가는 길이면 같이 가든가, 선참들이 모른 척 하고 다음날 주의를 주면 좋은데 꼭 새벽에 집합을 시키는 거다.

프로야구에서 집합이라, 다른 구단도 많았지만 유독 해태가 심했던 것으로 안다. 해태 신화의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한데.

집합은 하급 군사문화를 그대로 따라한 형태였다. 새벽 1, 2시 호텔 옥상에 집합할 때까지 코치가 몽둥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선수들이 다 모이면 코치가 최선참 선수의 뺨을 후려 친다. 당연히 최선참 선수가 열이 받지 않겠나. 그럼 자기 바로 밑 후배를 나오라고 해서 배트로 때리는 거다. 그 후배는 다시 바로 밑 후배를 엎드리게 한 뒤 매질을 가하고. 이게 어디 프로야구팀인가, 군대지. 한 번은 집합을 하라는 최선참 선수의 지시를 내가 막은 적이 있다. 정말 답답한 건 그렇게 매질을 당했던 선수들이 선참이 돼서 똑같은 짓을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 삐뚤어진 보상의식을 바로 잡지 않는 이상 팀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2000년 선수협 결성과 해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런 와중에도 재활에 성공해 2001, 2002시즌 중간계투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2년에는 47⅔이닝을 던져 5승 3패 8세이브 12홀드를 기록하며 해태 투수진의 듬직한 버팀목이 됐다.

두 시즌 연속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여러 가지 실망으로 야구에서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그토록 개선하고자 했던 운동 환경이나 룰도 어느 것 하나 변한 게 없었다. 그럴 때면 호주에 있는 아내와 아들 생각이 간절했다.

당신의 은퇴는 잠수함처럼 조용히 이뤄졌다. 당신이 은퇴했다는 것조차 모르는 이들이 아직도 있을 정도다.

2002시즌이 끝난 뒤 아내와 통화를 하고 마음을 굳혔다. 은퇴하기로. 이왕 야구판을 뜨는 거 조용히 떠나자는 결심을 했다. 혼자 짐을 꾸려 가족이 있는 호주로 미련 없이 떠났다. 지금도 그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한국과 호주에서 어린이 야구교실을 운영하는 게 꿈

한국나이로 40살이 된 박충식은 호주에서 슈퍼마켓과
초밥집을 운영하며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현역 야구
선수였을 때나 지금이나 그는 더 여전히 땀의 진실을 믿고 있다.

호주는 언제 왔나.

2004년이다.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누구 말대로 야구판 떠나면 6개월 동안 매일 야구생각밖에 안 난다더니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말 할 게 없었다. 아들이 학교 가고 아내가 영어 배우러 나가면 혼자 집안일 하다, 마당에 돌아다니는 도마뱀 보고 볕 쬐는 게 다였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한 달에 수백만 원씩 국제전화비를 썼겠는가(웃음).

하지만 지금은 성공한 사업가다. 퀸즐랜드주 골드코스트에 위치한 당신의 슈퍼마켓 ‘드림마트’는 주변에서 장사 잘 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원래 처음 했던 장사는 슈퍼마켓이 아니라 한식당이었다. 동업으로 시작했는데 의외로 잘 돼 지금의 슈퍼마켓까지 하게 됐다. 요즘은 브리즈번에 초밥점을 내려고 준비 중이다. 한창 인테리어 공사를 하느라 매일같이 골드코스트와 브리즈번을 왕복하고 있다.

성공의 비결을 알고 싶다.

성공? 나도 처음에는 무료한 삶과 현지 정보에 어두워 손해를 많이 봤다. 하지만 야구와 이민생활도 다를 게 없다. 남들보다 열심히 살면 된다. 호주인들이 경영하는 가게는 대개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 다른 한국분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오후 7시 정도 마감한다. 하지만 내가 운영하는 슈퍼마켓은 오후 11시까지 문을 연다.

아들이 골프선수라고 들었다.

원래는 야구선수로 키우려고 했다. 다행히 야구도 꽤 잘했다. 그런데 본인이 골프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야 지금도 야구선수로 키우고 싶지. 내가 뭐 골프에 대해 아는 게 있나(웃음).

앞으로도 계속 호주에 살 생각인가.

그래야하지 않을까. 지금은 아니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면 꼭 하고 싶은 게 있다.

그게 뭔지 궁금하다.

어린이 야구교실을 운영하고 싶다. 호주에서 벌여놓은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호주와 한국에 각각 어린이 야구교실을 차려 운영하고 싶다. 어쨌거나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오는 데는 야구가 큰 도움을 줬다. 이젠 내가 야구와 팬들에게 빚진 은혜를 갚을 차례다.
이름 : 박충식(朴衷湜)
생년월일 : 1970년 9월 3일
체격 : 183cm / 79kg
이력 : 광주상고-경희대-삼성-해태-KIA
프로입단 : 1993년
통산성적 : 77승 44패 30세이브 평균자책 3.07
Posted by 최강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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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시즌 영수 없이는 삼성도 좋은 성적 기대하기 어렵다.

부디 2004년의 모습까진 아니더라도... 구속부터 찾고. 수술후유증을 훨훨 털어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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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강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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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 2차 3순위로 지명되었으니, 벌써 8년차 중견선수가 되었구나..
내야 전포지션을 소화할 정도로 수비력은 검증되었지만,

아직 방망이가 문제로다....
하지만 최근 연이은 불방망이를 보여주고 있다.


선구안이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느낌이다. 공을 끝까지 보고 .. 1구 1구 신중한 타격자세~~
오랜 2군 생활에.. 더욱 성장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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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골반 돌리는것과... 배트스피드가 좀 쳐져보이는 느낌..
1군에서 꾸준히 30경기만 출전하면... 가능성이 타진될텐데..
박석민, 조동찬이 부진한 틈을 타서... 3루를 꿰찰수 있는 기회이긴한데...
결과가 궁금하다
3루수로 0.280만 쳐주면.. 대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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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넷고르는거 보면.. 확실히 선구안 좋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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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명구랑 방 같이 쓸때.. 맨날 명구옆에서 카트라이더나 하더니.. 어느덧 8년차라니.. ㄷㄷ
세월 참 빠르구나....... 명구 3년 후배인데..... 오늘따라 명구가 보고싶구나.
Posted by 최강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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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홈런왕 타이틀을 따지 못했고, 장종훈, 이승엽, 심정수에 항상 가려져 있던 양신...
그러나 꾸준함을 이길것은 없다.  드디어 한국 신기록을 작성했구나.. 자랑스런 우리의 양신

요즘 삼성야구에 부쩍 회의를 느끼면서.. 옛날 향수에 젖어 있느라.. 야구장을 뜸하게 가는데..
어버이날이라 대구 내려온김에.. (마침 선발이 영수라서)
시민운동장을 찾았다


왠지 오늘 신기록이 나올거 같아서.
그동안 한번도 찍지 않았던 양신의 신기록 보드를 찍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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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복이 5이닝을 마치고 내려가자, 김재박 감독은 수순대로
좌타자 양신과 최형우를 상대하기 위해 류택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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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택현은 볼넷을 내준다는 각오였는지... 심하게 코너웍이 된 공을 연달아 던진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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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투를 놓칠리 없는 양신..  밀어쳐서 왼쪽 담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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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홈런을 확신하지 못했는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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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을 확신하는 순간.... 그 순간을 천천히 즐기며.... 그라운드를 도는 양신.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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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약속한대로.. 문워크 세레모니를 할려다가, 스파이크가 인조잔디에 걸리는 바람에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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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활짝 웃는 양신.. 참 오랜만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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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 은 사라지고.. 신기록이 그 자리를 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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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 장면 동영상이 전광판에 나오자.....
정현욱.. 별 관심 없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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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강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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