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선수들이 새록새록....
출처: 삼피 이명호님



82년의 프로야구는 이선희의 만루홈런에서 시작해 이선희의 만루홈런으로 끝이 났다. 이선희는 한국 프로야구의 신성한 제단(oracle)에 산제사로 바쳐진 희생양(scapegoat)이었다.

82년 3월27일 토요일. 전두환의 3S 정책이 고고한 함성을 발하던 날. 이미 81년 무렵부터 프로야구 프랜차이즈 협상이 연일 신문지면에 오르내렸고, 은퇴한 재일교포 야구선수 장훈이 자주 한국에 들렀다. 롯데 쌕쌕 오렌지 광고(“쌕쌕 정~말 맛있습니다”라고)도 하면서. 여기에 맞선 백인천, 그 이름도 찬란한 영양제 ‘게브랄 티’(여기에서 ‘랄’을 좀 길게 발음해야 한다. 그리고 ‘게’를 ‘개’로 바꾸면 안된다. 4할대를 넘는 타격왕 백인천의 광고로 인해 이 제품은 60~70년대 원기소 이후 최고의 영양제로 등극했다)

프로야구 개막일인 이 날, 야구를 하기에는 적당치 않을 정도로 쌀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대문야구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 시구는 불세출의 골키퍼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그는 고교시절 대구공고 축구부 골키퍼였다) 70년대 박정희의 박스컵 축구대회 시축 이후 처음 보는 장면. 광주항쟁이 끝난 지 만 2년이 채 안됐을 때였다.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

경기 초반은 삼성의 독주였다. 이미 삼성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지목됐으니까.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프로야구 초창기는 철저한 프랜차이즈 위주로 진행됐기에 그 지역 고교를 졸업한 선수는 몽땅 그 지역 야구단에 가입하도록 돼있었다. 그런데 대구의 고교야구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그때의 선수들이 모두 삼성으로 고스란히 들어왔으니 우승을 못하는 게 이상한 거였다.

그리고 그때 경북고 야구감독으로 대구에 ‘구도’(球都)라는 이름을 붙이게끔 만든 다이아몬드의 제갈공명 서영무 감독이 삼성의 지휘봉을 잡았다. 거기에다 구단은 대한민국 1위 재벌, 삼성이 아닌가? 우승에 필요한 모든 게 다 갖춰진 듯 했다.

한양대를 갓 졸업한 삼성의 이만수는 5회초 홈런을 날려 ‘프로야구 첫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프로야구 첫 안타도 이만수 차지였다. 7대3, 경기는 거의 끝난 듯 했다. 앞으로 삼성의 전도양양만 남아있는 듯했다.

6회에 머리가 훌렁까진(그전까진 고교야구만 보아왔던 터라 머리까진 사람이 야구를 하는 건 그때 처음 봤다) 40살의 백인천(MBC 청룡의 감독 겸 지명타자)이 쓸쓸한 솔로홈런을 칠 때도 여유만만이었다. 나와 함께 경기를 지켜보던 할아버지께서는 ‘다 늙어서 그래도 감독 체면치레는 했다’고 안도해 하셨다.

그런데 이게 웬 일? 7회말에 포수 유승안이 3점 홈런을 날려 졸지에 동점이되고 말았으니. 불길한 예감. 경기는 연장전. 그리고 운명의 10회말. 투수는 한국 최고의 좌완투수 이선희.(가수 이선희가 아니다) 2년 전인 80년 일본과의 국가대항전에서 한국 대표로 나가 최동원을 구원하며, 일본 타자들을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던 그가 아닌가? 강속구, 자로 잰듯한 컨트롤.

주자는 1, 2루.(2, 3루였던가? 하여튼 그건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타석에는 3번 타자 유승안.(2, 3루가 맞았던 것 같다)걸러야 한다. 저 선수, 오늘 일 낸다. 조마조마.

그런데 이게 웬 일. 택도 아닌 공에 방망이가 나가 가볍게 아웃.
(이때 백인천 감독은 무조건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그런데도 방망이가 나간 것에 대해 유승안은 후일 ‘상품인 오토바이가 탐나 나도 모르게 방망이가 나갔다’고 자백했다. 백인천은 ‘그때 유승안이 내 말을 들었더라면, 개막전의 영웅은 내가 됐을 것’이라며 껄걸 웃곤 한다. 유승안은 이때 미운 털이 박혀서인지 이후 주전 포수는 선배 김용운에게 내어주는 경우가 더 많았고, 결국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되고 만다. 유승안의 전성시절은 빙그레에서 시작됐다)

이어 4번 타자, 백인천. 또 걸러야 한다. MBC에는 왜 이렇게 걸러야 하는 타자가 많은거야? 짜증나게. 역시 고의 4구로 만루 작전. 5번 타자 이종도. 비록 크린업 트리오이긴 하지만, 그래도 3명 중엔 제일 만만하다. 종도형, 아저씨, 제발.

“딱”

홈런, 그것도 만루홈런. 그냥 1점만 나도 끝나는데, 기어이 4점을 내고야 마는 저 잔인함. 소년의 기도를 무참히 짓밟고서 이종도는 다이아몬드를 돌아 타석에 들어서면서 높이뛰기 선수마냥 거의 1m는 뛰어올랐다. 만세 포즈를 취한 채.

야구가 끝난 뒤 3대가 함께 한 저녁식사 자리는 침울했다. 세상을 오래 사신 할아버지께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쉽게 체념하면서 ‘질 경기였다’는 칼빈의 예정설에 가까운 연설을 했고, 아버지는 애꿎은 ‘이선희 욕’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그때 왜 그런 공을 던졌느냐며. 마치 아버지가 다음날 마운드에 올라갈 태세였다.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야구 룰도 모르는 기타 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어린 남동생 등은 무덤덤.(이승엽의 부인, 이송정씨도 이승엽과 데이트 하던 당시, 야구를 전혀 몰라 둘이 서로 마주보고 아무 말이 없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송정씨 왈, “홈런 치고 운동장 한 바퀴 뛰면 힘들지 않아요?”-마치 힘들 게 왜 홈런치느냐는 말투로)

그러나 그땐 몰랐다. 그 만루홈런이 시리즈 마지막 날 또 한 번 이어지리라는 그땐 몰랐다. 그 만루홈런이 삼성 라이온즈 팬의 22년 악몽의 시작일 줄은...

삼성 라이온즈는 곧잘 했다. 투수진은 삼각 마운드라 일컫는 황규봉, 이선희, 권영호각 각 15승씩을 거둘 정도였다. 전반기는 기대하지 않았던 좌완 권영호가 9승을 거둬 팀내 최다승 투수로 자리잡았고, 후반기에는 이선희가 뒷심을 발휘했다. 황규봉은 전후반기 내내 고른 성적을 거뒀고, 특히 후반기로 접어들면서는 세이브 투수로 자주 나섰다. 여기에 4선발 성낙수가 간간히 나와 지친 선배들의 어깨를 풀어주듯 8승을 챙겼다. 믿기지 않을는지 모르겠지만,

이들 4명이 삼성 투수 전부다. 삼미 슈퍼스타즈 이야기가 아니다. 최강이라는 삼성에서 그랬다. 다른 팀도 마찬가지였다. 박철순이 그해 22연승(24승)을 거두고 허리병이 나 이후에는 근근히(?) 버틴 것도 이 때문이다.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는 변형된 고교야구였다. 삼성에는 이들 4명 외에 박영진, 송진호 등 2명의 투수가 더 있긴 했지만 박영진은 말 그대로 패전처리 투수인데다 그 나마도 등판한 적이 거의 없고, 송진호는 투수와 타자를 왔다갔다 했다.

삼성 라이온즈의 타자들은 상대적으로 다른 팀에 비해 두터웠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한 번 불붙으면 무서웠다. 특히 삼성의 가장 큰 특징. 강팀에 약하고, 약팀에 강한. 점수 더 필요없을 때 계속 점수 내고, 딱 1점 필요할 때 그 1점을 못내는.

그 특성은 특히 삼미 슈퍼스타즈를 만날 때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해 6월12일 오대석의 사이클링 히트 등 전원안타를 터뜨리며 삼미를 격파하던 날. 이때 기록한 한 경기 팀 최다안타(27개)는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그해 6월, 아니면 7월 어느 날. 후기리그가 한창이던 때, 이름 끝자가 ‘욱’인 친구랑 처음으로 프로야구 경기를 보러갔다.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 나이트 경기였으니, 아마 토요일이었나 보다.

야구장 부근에서 약국을 하는 작은 고모에게 들러 박카스 한 병 마시고(작은고모는 지금도 이곳에서 ‘시민약국’이라는 약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서 제 이야기 잘 하면, 아마도 박카스 한 병쯤은 얻어마실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을 회복하러 나서는 십자군 소년병처럼 보무도 당당히 뿌듯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야구장엘 들어섰다.

1000원인가 내고, 외야에 자리잡았다. 내야는 2000원, 본부석은 3000원이었다. 외야로 간 것은 돈도 돈이었지만, 눈앞에 둘러친 답답한 그물망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나이 때는 그런 법이니까.

그때만 해도 외야 구장은 콘크리트 계단 대신 풀밭 계단이어서 엉덩이도 내야보다 덜 뜨거웠고, 녹진녹진한 진흙 쿠션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운 좋으면 홈런 공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러나 불찰이었다. 외야의 필수품, 망원경도 라디오도 가져오지 않은 탓에 우리는 도무지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 감이 전혀 오지 않았다.(당시 김동엽 아저씨가 광고하던 망원경과 라디오가 결합된 라디오망원경과 선수명단이 수록된 팜플렛, 그리고 햇빛 가리는 종이모자 등은 필수품이었는데)

삼성 투수는 권영호. 그런데 어째 좀 맞는다 싶더니, 김우열에게 홈런을 맞아버렸다. 그러다 좀 있다가는 윤동균에게도 홈런, 또 이씨 성 가진 중견수(이홍범이었던가?)에게 또 홈런. 점수는 점점 벌어지고 승부는 이미 물건너 갔다. 그 사이 투수도 바뀌었다.

관중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서영무 감독이 마운드로 걸어나와 투수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다가 덕아웃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관중석 어딘가에서 소주병이 날아가자, 연이어 날라가는 콜라병, 사이다병 등등. 장관이었다. 폭포수 같았다고나 할까?

서영무 감독은 코앞에 덕아웃을 두고도 들어가지 못해 사정거리 밖 그라운드에 뻘쭘(정말 그랬다)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감독 체면에 고개 숙이고 날아오는 소주병 요리조리 피하면서 들어갈 순 없지 않았겠는가?

승부는 이미 멀어졌고. 9회 삼성의 마지막 공격. <한지붕 세가족>의 세탁소집주인아저씨(최주봉)들이 단체응원을 온 듯 “만수야~”라는 함성이 메아리쳤다. 이때만 해도 이만수는 아직 미완이었다.

82년 이만수의 타율은 3할이 안됐고, 홈런은 고작 13개 뿐이었다. 타격은 오대석(유격수)이 나았고, 타점은 결정적일 때마다 한 방을 터뜨려주는 함학수(1루수)가 있었고, 호타준족 장태수(중견수), 허규옥(우익수), 정구왕(좌익수) 등이 즐비했다. 수비에는 그라운드의 여우라는 배대웅(2루수)과 천보성(3루)이 철통마크를 했다. 이만수는 투수 리드도 그리 훌륭한 편은 못되었다. 이선희의 개막전, 한국시리즈 만루홈런에는 이만수의 책임도 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은 늘 “만수야~”라고만 외쳐댔다. 나도 그랬다. “만수 아저씨”가 아니면 최소한 “만수 형~”이라고는 해야됐지만, 무조건 “만수야~”였다.

그러나. 이만수는 예상대로 특유의 병살타로 화답했다.(그랬던 것 같다. 이만수는 역대 최다 병살타 타자다. 아직도 이 기록은 깨어지지 않고 있다. 아마 홈런과 병살타 숫자가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9회말 투아웃. 더 볼 것도 없다.

외야가 술렁이더니 이번엔 외야에서 소주병이 날아들었다. 외야에 있던 OB의 이근식, 윤동균 등이 소주병을 피해 본의 아니게 전진수비 위치로 내려갔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외야플라이만 치면 무조건 안타다. 아, 이 고도의 치밀한 계산을 한 대구 관중들이여. 내 친구와 나도 거기에 동참하고자 다 먹은 콜라 캔을 집어던졌다가 옆자리 아저씨들한테 호통을 들어야 했다. 거의 때릴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헤겔의 변증법적 정반합 논리가 작용하듯 어디에선가 “질서”, “질서”라는 또다른 함성이 울려퍼졌다.(대한민국은 원래 70년대 이래 지금까지 ‘질서’에 살고, ‘질서’에 죽는 ‘질서 민족’ 아니었던가? 이경규가 한 마디 하면 횡단보도 정지선 앞에 쫙 늘어서고, 운동하라면 운동하고, 부모님께 전화걸라면 전화 걸고)

그렇게 소요사태는 절로 자정이 되었고. 그리고 경기는 삼성의 참패로 끝이 났다. 그런데 소요사태는 장외에서 연이어 일어났다. 흥분한 관중 일부가 구장을 나가다 야구장 출입문을 때려부시자, 마치 동학 민중봉기의 전봉준 함성처럼 신호탄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사회 불만세력(?)의 폭동이 일어났다. 이 장면은 이후 대학에 들어간 뒤 종로 서울극장 앞에서 먼산 보고 서 있다가 누군가의 신호성 구호가 터지자 연이어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고, 저 멀리서 전경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도망갔던 그때의 장면과 너무도 흡사했다. 나는 그때 도망가면서 82년 대구 운동장이 떠올랐다.)

일부는 돌을 집어다가 가로등을 깨뜨려버렸다.(지금도 신기하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뿐인 그곳에서 돌을 어떻게 구했는지, 그리고 그 높은 가로등을 어떻게 맞췄는지? 이런 사람을 그때 삼성 라이온즈 투수로 썼어야 하는데... 아마 그는 80년대 대학가로 스카우트 됐을 지도 모른다)

어떤 아저씨는 슈퍼에 들어가 병으로 된 OB맥주 한 상자를 사더니 그대로 길바닥에다 몽땅 깨뜨려버렸다. 길바닥은 마치 하이타이를 풀어낸 듯 맥주거품으로 그득했다. 그리고 슈퍼 주인에게 윽박지르듯 소리쳤다. “앞으로 OB맥주 절대로 팔지 마세요, 크라운 맥주 파세요” 나는 지금도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그때 그 아저씨가 크라운 맥주 영업직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리고 팬들은 OB 선수단 버스를 막아서고 유리창을 두들겨댔다. OB선수들은 커튼으로 창을 가리고, 대역죄인처럼 겨우겨우 빠져나갔다. 삼성 선수단은 어디로 숨었는 지, 아예 나오지 않았다.

“시민 여러분, 이성을 찾으십시오”라는 운동장 아나운서 멘트가 구장 바깥까지 들려왔다. 시민 여러분들이 이성을 찾았는지, 어쨌는지 그날 더 이상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나는 어렴풋하게 생각했다. ‘삼성도 꽤 하는데, 하지만 어떻게 매번 이길 수 있나?’라고. 82년 삼성의 후기리그 성적은 7할이었다. 어마어마한 승률이다. 하지만 이는 5승35패라는 기록적인 승률을 기록한 삼미슈퍼스타즈로 인해 역시 7할에 가까운 OB와 피를 말리는 선두 다툼을 벌여야 했다.

그해 9월 말. OB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대구에서 열렸다. 그때까지 삼성과 OB는 후기 순위 공동1위였기에 그 경기의 승자가 후기 1위를 차지하는 거였다. 살벌할 정도로 냉정한 OB 김영덕 감독은 아예 전후기 독식을 원했고.(그는 85년 삼성 감독 시절, 정말로 전후기 독식을 했다)

마지막 경기는 피의 혈투였다. 9회 동점 상황에서 삼성은 허리가 온전치 않은 박철순을 내세웠다. 주자는 3루, 재간동이 장태수가 3루 쪽으로 기습번트를 들이댔고, 박철순은 이 공을 잡으려다 삐끗했다. 프로의 세계란 이런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나는 그래도 기뻤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10대 청소년마저도 '피도 눈물도 없이' 되어갔고, 그리고 그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추앙받는 것이 프로의 세계다. 그리고 그런 프로의 세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쨌든. 3루 주자가 쏜살같이 홈을 밟았다. 이겼다.

박철순이 마운드에서 쓰러지든 말든 그건 삼성이 알 바 아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됐다. 게다가 투수 박철순을 저렇게 골병들였으니. 모든 세상을 ‘우리편’과 ‘나쁜놈’으로 인식하던 때였다.

한국시리즈 1차전. OB는 박철순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전기리그에서 18승(정확치 않다)을 거둘 정도로(정말 만화같은 상황 아닌가?) 엄청난 괴력을 과시했지만, 후반기에는 부상 후유증으로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OB에서 박철순은 전력의 거의 50%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박철순을 빼고 OB가 어찌 막강 삼성을 이길 것인가? 나는 그렇게 야무진 생각을 했다.

그런데 1차전에 듣도보도 못한 강철원이라는 언더핸드 투수가 나타났다. 마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오혜성의 부상과 투수 조상구가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손병호 감독이 숨겨둔 배도협을 등판시키듯.

15회 연장까지 갔으나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1무.

2차전 대구 경기. 삼성은 신들린 듯 OB마운드를 두들겼다. 초토화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였다. 수비도 멋졌다. 좌익수 정현발은 홈런성 타구를 펜스 바깥으로 손을 뻗어 잡아냈다. 메이저리그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솔직히 포기하고 그냥 손을 뻗었는데 소 뒷걸음 성이 강했다)

나는 확신했다. 삼성이 OB를 대파할 것으로.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들과 내기를 하자고 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하고. 내기가 되지 않았다. 모두다 삼성이 이긴다고 하니. 아, 이 집단최면의 무서움이여.

3차전은 졌다. 뭐, 한 게임 정도 질 수도 있지.

4차전, 또 졌다. ‘뭐, 두 게임 정도 질 수 있지’......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특히 4회, 김우열의 내야 플라이가 높이 올랐다. 투수 황규봉과 포수 이만수가 공을 바라보며 잡으려 했다. 서로 미루면서 ‘어어...’하다 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화장실에서 뒤를 닦다 손가락이 휴지를 관통하고 튀어나올 때, 이런 기분이 들까? 황당도 이런 황당이 없다.

이후 OB의 안타가 터져나왔고, 4-4로 팽팽하던 경기는 7-4로 기울어졌고, 그리고 졌다. 그런 상황을 겪고도 이긴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5차전 또 졌다.

다리를 쫙 벌리는 신경식의 가랑이가 찢어지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박철순의 허리가 <흥부전>의 제비다리 부러지듯 녹지끈 부러지길 얼마나 바랐던가?

6차전. 이제 또 지면 끝이다. 운명의 9회초. 투수는 이선희, 타자는 김유동. 만루홈런. 다 아는 이야기다.

‘사자잡는 OB’라는 깃발을 흔들던 어린이 야구단들에게 분노를, 그리고 이근식, 구천서, 조범현 배신자 3인방(이들은 대구 대건고 출신이지만, 76년 무렵 대건고가 야구부를 폐지하면서 이들은 서울 충암고로 모두 옮겨갔다. 그게 삼성 라이온즈가 되었을 이들이 OB베어스 초대 멤버가 된 이유다. 그리고 이들은 너무 잘했다.)

프로야구 최단신인 2번타자 날다람쥐 이근식(키가 170이 안됐다. 다른 선수라면 스트라이크였을 공도 이근식에게는 높은 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투수들의 주특기인 낮은 공은 이근식에게는 치기 알맞은 적당한 공이었다. 게다가 왼손타자이니 숏다리의 단점을 보완하고 남았다), 2루수로 타격 5위권이었던 구천서, 지금 SK의 감독이 된 포수 조범현 등이 마운드에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포효하는 박철순을 끌어안는 그 심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철순이 마운드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덕아웃 부근에선 이선희가 땅바닥에 털석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인생에서 패배보단 승리에 익숙했던 이선희로선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었다.

비록 이선희가 만루홈런을 맞긴 했지만 이선희는 한국시리즈에서 분투했다. 황규봉과 권영호가 이미 밧데리가 다 된 상태에서 이선희가 거의 홀로 마운드를 지키다시피했다. 이선희는 연일 마운드에 올라왔고, 그 피로가 결국 만루홈런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쯤에서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을 한 번 일람해보자. 이 아래 이야기들은 당시 직접 못 본 것도 많으나, 프로야구를 접하면서 이후 알게 된 이야기들을 종합한 것이다.


<서영무 감독>

그는 제갈 공명이었다. 60년대 말에는 임신근, 70년대 초에는 남우식, 황규봉, 이선희 등으로 고교 야구대회를 휩쓸었다. 5관왕(대통령배, 청룡기, 화랑기, 봉황기, 황금사자기)은 기본이었다. 이 무렵 고교 야구팀들은 토너먼트 대진표가 나오면 자기 팀보다 경북고 위치부터 먼저 찾았다.

대통령배 대회 67~68년 2연패, 69년 한 해 쉬고, 70~72년 3연패, 73년 한 해 쉬고, 74년 또 우승. 81~82년 성준, 유중일, 문병권 등이 집단지도체제로 활약할 당시, 93년 이승엽 시절 경북고는 제2, 제3의 전성기를 반짝 맞긴 했다. 그러나 대통령배 대회의 경우, 서영무가 떠난 뒤 30년이 지나도록 아직 경북고는 우승하지 못했다. 그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오기 전만 해도 경북고 야구부란 그저그런 팀에 불과했고, 바로 옆에 있는 대구상고의 위세가 훨씬 막강했다. 서영무의 강점은 그저그런 선수들을 키워내고, 그들이 최고의 가치를 내게 만드는 데 있다. 그의 제자들을 일람해 보자. 앞에 든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천보성, 배대웅, 함학수, 조창수, 정현발, 정구왕, 성낙수 등. 그가 가장 가슴아파 하는 인물은 남우식이다. 황규봉, 이선희와 동년배였던 남우식은 고교 2학년때부터 초고교급 투수였다.

그러나 너무 잘했던 탓에 매번 우승을 하는 게 문제였다. 연투로 우승하자마자, 그 다음 대회에서 또 연투를 했다. 연투에 연투를 거듭한 끝에 그는 고교 시절에 어깨를 망쳤다. 이후 그는 빛도 없이 사라졌다. 82년 프로야구가 한창일 무렵, 회사원 생활을 하던 남우식이 텔레비전에 비춰졌다. “제 친구들이 그라운드에서 한창 달리는 모습을 보면 저도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쓸쓸한 눈빛이 아직도 가슴을 저미게 한다.
(서영무 감독 이야기가 남우식 이야기로 끝을 맺는군)


<임신근 수석코치>

거구였다. 그는 60년대 말 서영무 감독 체제 하에서 경북고 신화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투수 겸 4번 타자.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이미 은퇴했던 그는 처음에는 코치 겸 지명타자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다 나와 포볼로 걸어나갈 뿐 선수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황규봉 투수>

마음씨 좋은 아저씨같은 인상. 두둑한 배짱으로 흔들리지 않는 무심투구. 그역시 초고교급 투수였다. 대학 때도 빛을 발하다가 필리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참석했다가 묵고 있던 호텔에 불이 나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어깨를 다친 이후 기나긴 재활과정을 거치느라 어깨가 예전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로야구 초창기 82~87년까지 삼성의 수호신이었다. 세이브 투수의 계보 첫 머리에 오르는 선수다.


<이선희 투수>

이름 앞에 ‘비운의’라는 수식어가 꼭 붙는다.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 산화한 인물. 77년 니카라과 대륙간컵 대회 우승 당시 마운드의 주역이었다.(당시 타석에선 김재박의 활약이 눈부셨다) 70년대 말 최동원, 김시진 등 후배투수들이 치고 올라와도 국가대항전에서는 늘 이선희가 제일 믿음직스러웠다.

프로야구가 70년대말에 출범했으면 일세를 풍미했을 투수다.


<권영호 투수>

출범 초기 무명에 가까웠으나, 프로야구 출범 이후 만개했다. 초창기에는 왼손 선발로, 이후 황규봉이 떠난 뒤로는 세이브 전담으로 돌아섰다. 홈런을 종종 맞는 게 약점이었다.


<이만수 포수>

설명이 필요없다. “내 피는 푸르다”고까지 할 정도다.(사실 이 말은 푸른색 유니폼의 LA다저스 감독 토미 라소다가 80년대초 괴물투수 발렌수엘라, 홈런타자 호세 칸세코 등을 앞세워 월드 시리즈를 제패할 당시 한 말이다. 이 말을 푸른 유니폼의 삼성에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이만수가 이 말을 했다기보다는 아마도 스포츠신문 기자들이 지어낸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떨굴수 없다. 왜냐하면 이만수가 그렇게 재치있는 표현을 한다는 게 연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에 물대다 막 올라온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만수는 힘이 좋다(다른 걸로 연상하지 마라) 그냥 ‘힘’이 좋다. 어린 시절 이만수의 부친은 정육점을 하셨고, 못 먹던 한을 자식에게 풀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부친은 어린 이만수에게 삼시세때 고기반찬을 해먹였다. 그래서 이만수는 아침에도 삼겹살이나 등심을 먹고 학교를 가곤 했다. 다같이 못먹던 시절, 이만수의 삼겹살 아침은 그의 큰 자산이 되었다. 이만수는 이때의 습관을 기억한 위장과 창자 덕분에 프로선수가 된 뒤에도 아무 때, 어디선가(마치 ‘짱가’처럼)에서든지 식사를 잘 했다.

이만수는 84년 작년까지 유일했던 타격3관왕(타격, 타점, 홈런)을 차지한 인물인데다 83~85년 홈런왕 3연패의 화려한 기록도 빛나지만 그의 진짜 장점은 친근감이었다.

홈런을 치면 “이야”하는 환호성(그의 목소리는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하이 소프라노 또는 카스트라토(중세시대 때, 변성기 전 거세돼 어른이 되어서도 여자 목소리를 내는, 영화 <파리넬리>를 연상해 보라)에 가깝다.

게다가 사투리는 원단이다.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웃음을 터뜨린다. 거기에다 두 팔을 치켜들고 어린아이처럼 껑충껑충 춤을 추며 다이아몬드를 돈다. 그의 전매특허다.

이승엽은 홈런을 친 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관중석을 향해 오른손을 치켜들고 인사를 하며 천천히 돈다.(영웅의 풍모다) 양준혁은 홈런을 친 뒤에도 무슨 화난 사람처럼 입을 굳게 앙다물고 얼굴을 굳힌다.(특유의 오만함이 묻어난다) 마해영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지른다(마치 자기를 보낸 롯데에 복수를 표하듯)

여기에 비하면 이만수의 그 천진함이 팬들로부터 “만수야~” 합창을 끌어내게 만드는 원천이다. “승엽아~”, “준혁아~”라는 합창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 건 이승엽과 양준혁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비범함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만수는 이승엽과 양준혁과는 달리 사람들의 열등감을 자극하지 않는 영웅이었다.

한 마디로 이만수는 이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홈런타자임에도 불구하고 만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게 이만수의 강점이다. 게다가 82년 이만수는 병살타 1위였다. 아마 삼진도 최정상권이었을 것이다. 이것도 이만수의 강점이었다.

게다가 같은 홈런타자라도 이승엽이 1루수 또는 지명타자로 개인주의 성향을 짙게 풍기는 데 반해 이만수는 포수로서 특유의 하이톤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등 집단성이 강하다. 특히 교묘하게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타자 귀 바로 뒤에다 대고 “가자” 또는 “데끼리”(최고라는 경상도 사투리)라고

거의 괴성에 가까운 함성을 질러 타자들의 넋을 빼놓는다. 당시 전반기 홈런수위를 달렸던 OB의 김우열도 이만수의 이 함성에 깜짝 놀라 정신이 벙벙한 상태에서 삼진을 당한 적이 여러 차례 있다고 토로했다. 김우열은 후유증 때문이었는 지 후반기에는 홈런이 현저하게 줄어 홈런왕을 김봉연에게 헌납하고 말았다.

이만수에게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없다. 이게 장효조와 이만수의 다른 점이다. 아마도 당시 이만수가 팀의 막내였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가끔 양준혁이 후배들을 불러 세워놓고 혼을 내거나 열심히 하자고 다그쳤다는 뉴스를 본 적은 있어도, 이만수는 선배가 되어서도 후배들을 혼내거나 했다는 뉴스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만수가 영원한 ‘막내성’을 지닌 탓일까? 팀의 막내였기 때문일까? 이만수는 덕아웃에서도 좀체 쉬는 법이 없다. 투수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하고, 하여튼 파이팅이 넘쳤다.

고참이 되어서는 타석에 들어선 상대방 후배 타자들에게 연신 말을 건네 정신을 헷갈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야, 너 결혼하니 재미 좋냐? 너 어제 또 했지? 얌마, 힘 좋다고 그렇게 매일 하면 다리 후들거려서 선수 생활 못한다. 아껴라, 아껴. 아껴야 잘 살지”
(거의 말도 안되는. 이를 이만수의 하이톤으로 연상해보라. 신경을 좀 거슬리게 하는 게 아닌다. 이만수가 이런 말을 그대로 했는 지는 고증이 부족해 정확하진 않다)

이만수는 후배때도 선배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긴 했다. “행님요, 고마 쫌 하이소”라며.

그러나 해도 차면 기우는 법.(아니, 해가 아니라 달이구나) 90년대 초반만 해도 홈런왕 후보에 오르내렸던 그가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스타팅 멤버에서도 제외됐다. 그러나 그는 연봉을 깎아가면서까지 계속 은퇴를 미뤘다. 그의 은퇴는 본인은 물론 팬들도, 구단도 원치 않았다.

그가 90년대 후반 은퇴한 뒤 시카고로 건너가 코치 연수를 받고, 또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적지않은 혼란을 겪었다. 이만수에게 이런 지적인 면이 있었단 말인가 하고.

삼성팬들은 이만수의 귀향을 기다린다. 그가 코치로서, 또는 감독으로서 얼마만큼의 성적을 거둘 수 있을 진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만수가 감독으로 복귀할 경우, 그때도 대구팬들이 이만수를 향해 “만수야~”라고 외칠 것인지 궁금하다.

나는 어린 시절 이만수보다는 장효조를 좋아했다. 3번 장효조, 4번 이만수. 이는 83년부터 장효조가 롯데로 트레이드 되기 전인 88년까지 고정불변의 법칙이었다.

이만수의 평민성보다는 장효조의 귀족성에 더 끌렸기 때문이다. 이만수의 친근함보다는 장효조의 고독한 이미지, 왼손잡이라는 약간의 신비감, 잘생긴 얼굴, 카리스마 등 장효조의 모든 면이 나를 매료시켰다.

장효조는 이만수처럼 홈런을 자주 치진 않았지만, 병살타나 삼진을 당하는 적이 거의 없는, 한 마디로 스타일 구기는 적이 거의 없었다. 허점 투성이인(홈런 아니면 병살타) 이만수에 비해 장효조에게서는 완벽주의 냄새가 강하게 배어있었다. 부채살 타법으로 유명한 그의 타격 모션은 야구라기보다는 검술에 가깝다. 마치 폭포 줄기를 잘라내듯 수평으로 똑바르다. 이렇게 공을 때리면 타구가 가장 잡기 힘든 우익수 옆쪽으로 빨랫줄처럼 직선으로 쭉 뻗어나간다.

공이 뜨지 않기 때문에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홈런타자 이만수의 어퍼 스윙은 잘하면 홈런이지만, 잘못하면 외야 플라이가 되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이만수를 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릴 때가 많았지만, 장효조가 타격에 들어서면 긴장했다. 장효조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효조야~”(발음도 어렵다)라는 함성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이 장효조보다 이만수를 더 좋아한다는 것도 내가 이만수 아닌 장효조에 더 마음이 끌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 나이 때는 대중성을 애써 피하고자 하는 법이니까.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의 장효조는 정말 타격의 달인이었다. 초등학교 때였던가, 우연히 <주간스포츠>를 보다가 실업야구 경리단의 장효조 타격성적을 본 적이 있다. 6할6푼. 이게 인간이 낼 수 있는 타율인가?

장효조는 대구상고 재학시절, 3학년이었던 그에 대한 대학팀들의 스카우트 전쟁이 너무 엄청나게 진행되자 학교 쪽에서 3학년이 아니라 2학년이라고 속인 적도 있다. 왜냐하면 이때는 유명 선수 1명에 동료 몇 명을 끼워팔기 식으로 한꺼번에 대학에 보내는 게 학교와 감독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장효조는 대학에서도, 실업에서도, 군에서도 늘 타격 1위였다. 게다가 홈런도 종종 쳤고, 발도 빠르고, 수비도 훌륭했다. 한 마디로 야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췄다. 선구안도 좋고, 승부근성도 뛰어났다. 83년, 85년, 86년 타격왕을 차지할 때 박종훈(0B), 김종모(해태) 등이 후반기 끝무렵까지 타격 1위를 지켰으나, 막판 장효조의 불꽃같은 연속안타(장효조는 8월쯤부터 타격이 빛을 발했는데, 4타수 4안타 정도는 기본이었다)에 대부분 막판에 장효조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장효조는 자신의 시대가 끝난 91년(이때 장효조의 나이는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에도 또 한차례 타격왕에 도전했다. 상대는 이제 막 피어오르는 10살 정도 차이나는 이정훈. 장효조에 비해 장타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같은 왼손타자에 장효조의 부채살 타법을 이어받은 이정훈. 그때도 장효조는 막판 급 피치를 올렸다. 87년 타격왕을 끝으로 88년에는 타격왕을 같은 팀 후배 김성래에게 내줬고, 89년에는 롯데로 트레이드돼 간신히 타율 3할에 타격 5위로 떨어지다, 90년에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3할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 은퇴만 남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91년 후반기 급피치를 발하는 장효조는 무섭게 대시했다. 마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후배 이정훈도 비겁하게 선발에서 빠지면서 타율관리하지 않고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까지 끝까지 나서는 등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쳤다.

이정훈 3할4푼8리, 장효조 3할4푼7리.

1, 2위를 엎치락뒷치락 하다 마지막 경기에 안타를 생산하지 못해 결국 타격 2위로 끝마친 장효조는 그렇게 아쉬워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담담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확했다.

장효조는 이후에도 선수생활을 좀더 했으나, 91년 마지막 경기가 장효조의 마지막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의 생애통산 타율 기록(정확하게 얼마인지는 모르겠다)은 지금도 깨어지지 않았다. 이종범이 한때 능가한 적 있지만, 선수생활이 길어지면서 다시 장효조 밑으로 밀렸고, 장효조의 7년 연속 3할 기록을 깨뜨린 양준혁이 아마 장효조를 능가할 진 모르겠다.

그리고 타격왕 4차례(이는 양준혁이 타이를 이뤘다), 3연속 타격왕(85~87), 출루율 6차례, 5연속 출루왕(83~87년) 등은 앞으로도 쉽게 깨어지지 않을 기록들이다.

아마 그가 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만 아니어서 82년부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면 원년 4할 타율에 백인천과 함께 이름을 올렸을 지도 모른다. 어린시절 우상이었던 탓인지 82년 원년 멤버도 아니었던 장효조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어린 시절 이만수보다는 장효조를 훨씬 좋아했으나, 나이가 들면서, 세월의 흐름 탓일까, 나도 이젠 장효조보다는 이만수에 더 마음이 끌린다.

다시 원년으로 돌아가자.


<함학수 1루수>

사실 타율은 2할6푼~2할7푼대의 평범한 타자였지만, 늘 가장 중요한 순간에 홈런 등으로 타점을 기록하는 보배같은 타자였다. 원년 함학수는 오직 타점 부문에서만 5위에 올랐다. 이만수와 같았다.


<배대웅 2루수>

수비의 달인이었다. 날다람쥐처럼 튀어올라 이만수의 공을 잡아 2루 도루를 저지하는 모습, 그리고 1-2루간을 빠지는 공을 몸을 날려 역모션으로 잡아내는 모습은 일품이었다. 타격도 예전에는 잘했다고 알려졌으나, 프로야구가 개막할 때는 이미 그의 시대는 아니었다. 원년 주장을 맡았던 것 같다.


<천보성 3루수>

전기리그에는 3루수를 김한근이 주로 맡다가 후반기 들어 천보성이 들어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타격보다는 수비에서 일가견이 있었다. 역시 개막 당시 그의 시대는 아니었다.


<오대석 유격수>

프로야구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삼미와의 대결에서. 이때 그는 3루타, 2루타, 1루타, 홈런 순으로 안타를 때렸다. 3번째 안타인 1루타 때는 사실 2루타성이었지만 기록을 배려하는 감독의 지시로 더 이상 뛰지 않았던 것 같다.

이만수와 대구상고 동기동창인 오대석은 프로야구 개막 당시 이만수의 빛에 가렸으나,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타격에서 이만수를 훨씬 앞서 달렸다. 초창기 타격이 지지부진했던 삼성 라이온즈 타격을 이끌었던 건 1번 장태수, 2번 허규옥, 3번 오대석 등 이들 소총수 3인방이었다.

오대석은 김재박-오대석-유중일-이종범으로 이어지는 유격수 계보의 한 축을 잇는 인물이다. 이종범을 잇는 유격수가 탄생하지 않는 건 한국 야구의 비극이다. 이는 타자들 가운데 홈런타자 등 장타력 좋은 타자들이 늘어나면서 유격수의 존재가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는 유격수의 에러 하나 또는 명수비 하나가 경기의 흐름을 바꾸기보다는 홈런 한 방이 경기의 흐름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산업혁명 초기 공장이 들어서면서 몰락한 농민들, 엔클루저 운동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자본주의의 모습도 어쩌면 예전에는 참으로 중요했던 유격수를 점점 볼품없게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이젠 홈런 아니면 안되는... 홈런을 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제 갈 곳이 없다.


<좌익수 정현발>

가끔씩 터지는 장타가 일품이었으나, 역시 자신의 시대를 지나 프로야구가 개막한 탓에 큰 활약은 못했다.


<중견수 장태수>

무명 야구선수가 김성한(해태), 신경식(OB) 등과 마찬가지로 프로야구 개막으로 빛을 봤다. 외야 플라이를 날다람쥐처럼 몸을 던져 잡아내는 멋진 수비, 루상에 나가면 그라운드를 휘젓는 도루, 악착같은 승부근성 등 그에게는 삼성에게서 가장 부족한 헝거리 정신이 배어나온다. 그는 경북고도, 대구상고도 아닌 대건고 출신이었다. 아마 중학교 때 빛을 못 봤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런 이름도 없이 아마추어 생활을 했고, 국가대표에 뽑힌 적도 물론 없다. 체구도 자그마했다.

그는 80년대 후반까지 삼성의 외야를 굳건히 지키며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내 뒤에 앉은 녀석이 장태수가 자기 동네(장기면이던가?) 출신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랑했다.


<허규옥 우익수>

허규옥은 2번 타자였다. 루상에 주자가 나가면 왼손타자의 이점을 살린 기습번트를 대기도 했고, 발도 빨랐다. 하지만 장태수의 헝거리 정신에 비해 허규옥은 늘 여유있는 플레이를 했다.

실업야구 시절 타격왕(아마도 79년)을 차지하기도 했던 그는 투수를 괴롭히는 타자였고, 수비도 뛰어났다. 그가 지키는 라이트필드에서는 라인 드라이브가 좀처럼 나기 힘들었다.


<지명타자 김한근, 손상득, 박정환>

김한근은 원래 3루수였다. 장타력이 일품이었으나, 수비에서는 천보성에게 밀려 지명타자로 주로 출장했다. 손상득은 포수였으나, 후배 이만수에게 밀려 지명타자로 자주 나섰다. 나중에는 이만수가 지명타자로, 손상득이 포수로 나서는 경우도 많아졌다. 포수 리드는 최소한 이만수보다는 나았다.

박정환. 역시 포수 출신이지만, 프로에서는 지명타자로 주로 활약했다. 7월 무렵 연일 홈런포를 터뜨리는 불꽃 방망이를 과시하기도 했다.


<기타 서정환, 정구왕, 박찬>

서정환은 김재박과 오대석의 가운데 인물이다. 경북고 신화의 주역이었으나, 프로에서는 후배 오대석으로 인해 뛰어난 실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출장 기회가 없어 눈물을 삼켰다.

시즌이 끝난 뒤 “다른 팀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해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이후 해태에서 그는 펄펄 날았다. 86년에는 팀동료 김일권을 꺾고 도루 1위에 오르기도 했다. 83~88년까지 도루 10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정구왕. 시즌이 끝난 뒤 삼미로 트레이드됐다. 개막 초반에는 타격 1위를 내달리기도 했다. 발도 빨랐다. 삼성의 외야진이 너무 두터워 제 실력을 다 펴지 못한 선수다.

박찬. 어린 시절 팬이었다. 그는 7월말 무렵, 삼성 타선이 부상병동으로 바뀔 무렵, 혜성처럼 나타났다. 백인 혼혈아였던 그는 서구 체형에 메이저리거 같은 호쾌한 타격을 선보였다. 7월말~8월초 박찬은 연일 안타, 홈런을 터뜨려 일약 오대석-이만수-박찬의 클린업 트리오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코리안시리즈에서도 박찬은 OB 투수들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후 가뭇없이 사라졌다.
Posted by 최강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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